예수는 바벨을 사랑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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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에 대한 전설은 너무나 유명하다. 혹자는 그것을 '종교적'으로 재해석하기도 하고, 그 전설이 주는 메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댄 브라운은 다빈치 코드를 씀으로서 국내 기독교적 지도자들에게 '바벨탑을 쌓는 적그리스도적 인본주의'라는 이해하기도 어려운 욕을 먹고 있으며,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자신의 최근 저작인 '신'에서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신화적 믿음을 산산히 조각내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어쨋든 많은 이들이 너무나 당연시 하고 있기에 바벨탑은 우리 가슴에 너무나 굳건히 서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제시해보자. 바벨탑은 신에게 가까이 가려는 인간들에 의해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을 시기한(이라기 보다는 마음에 안 들어한) 신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러니까, 인간은 신에게 대들면 안된다. 다른 말로 깝 노노. 자. 과연 이것이 진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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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전설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가치가 많은, 이른바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천연의 보고 같은 곳이지만, 그 엄청난 가능성들로 인해 시도도 하기전에 뻗어버리게 만드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쪽으로는 전혀 무지한 필자는 바벨탑 전설을 가능한한 자연스럽게 재해석해 보려고 한다.

일단 바벨탑 전설을 이루는 목적성에 대한 접근을 해보자. 이것은 인류학이라기보다는 인간학에 가까운 성격을 띄는데, 인간은 한 개인으로서 높은 완성도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라는 집단으로 엮일 경우에 의외로 진화에 퇴행하는 성격을 띄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제도에 대한 머무름을 추구하는 일종의 안락주의적 경향으로도 볼 수 있는데, 자세한 이론적 설명은 뛰어넘고서라도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가졌던, 신과 같은 완벽함의 추구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욕구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신에 더 가까운 존재로 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전설은 그것을 '신에게 더 가까이 가는 행위' 로서 바벨탑을 제시한다. 이미 우주로 손을 뻗은 인류가 보기엔 뭔가 요상한 방법이지만, 물리적 거리감은 정서적 거리감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니까, 그렇게 이해를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하지만 여기서 뭔가 이상한 것은, 바벨탑을 건설하기 위해(위에서도 설명했지만 그것은 인류로서가 아니라 한 개인의 욕망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바벨탑을 건설하는 것은 같이 엄청난 사업이다. 여기서 잠시 과학적 영역으로 들어가 본다면, 고층 건물을 세울수록 건물의 밑면적 - 1층의 넓이 - 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져야 한다. 그것은 바람으로 인한 저항에서 고층건물이 균형점을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고층건물은 위로 갈수록 조금씩 얇아지는 성향을 보인다. 하지만 바벨탑은 그 높이가 상상을 초월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는 건축이 불가능 할 것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인부들이 물자를 나르기 위한 통로까지 가설해야 한다고 가정했을 때, 그 안전성마저 추구한다고 하면 밑면적은 엄청난 넓이가 됨을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면적은 대충 얼마나 될까? 건축학자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안정적인 건축물을 뽑아보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피라미드라고 답할 것이다. 피라미드의 구조는 모래를 퍼서 바닥에 자연스럽게 흘렸을 때, 모래가 일정한 각도를 두고 원뿔형 모양으로 쌓이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 때의 각도와 똑같다고 한다. 이 각도가 대략 52' 이며, 계산의 편의성을 위해 45'라 가정하고, 바벨탑의 높이는 대기권의 높이인 - 대기권을 이탈한다면 충분히 높지 않을까, 라기보단 그 이상 작업이 불가능 하기에 - 10km로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바벨탑이 원뿔모양을 이루게 될 터인데, 제일 기반이 되는 1층의 경우엔 반지름이 10km인 원뿔형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바벨탑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다면 밑넓이는 대충 314km^2 이 된다. 음. 서울의 넓이가 약 600km^2을 초과하니, 이거 엄청나지 않은가. 정말 무시무시하게 거대한 사업일 것이다.

이런 엄청난 사업을 혼자서 진행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국가급이 아니라 전 세계적 사업이 될 거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다면 이 사업에 동원되는 인력도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아진다. 아, 한 개인의 욕망을 위해 엄청난 이들이 희생된다니, 라고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그건 아니다. 모든 개인이 같은 목표를 지닌다면, 그리고 그 목표가 개인의 힘으로 쉽게 이룰 수 없는 것이라면 그 개인들은 쉽게 집단화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게다가 신에게 가까울 정도의 완벽한 추구는 인간으로서 누구에게나 있는 본능적 욕망이니까, 어느 누구를 끌어들이는 것에 주저함은 없다. 나아가자 바벨탑 건설팀!!

자 이로서 바벨탑을 건설함에 대한 청사진이 만들어졌다. 바벨탑 건설의 목적은 누구에게나 있는 신적 완성도를 지니기 위해서, 투입인원은 전 세계적 인력 동원. 간단하구나.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바벨탑이란게 쉽사리 만들어지는 건축물이 아니다 보니, 우리는 자유주의 체제가 낳은 가장 위대한 발명품, 분업을 이용해야 한다. 자, 그렇다면 그 분업은 쉬운가. 원래 일이라는걸 하다보면 분명히 쉬운 일도 있고, 어려운 일도 있다. 하기 싫은 일을 누구는 안해도 되는 반면, 그 일을 해야할 누군가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이것이 바벨탑 건설의 첫번째 문제점이자, 바벨탑이 건설되지 못했던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개인이, '난 이 거대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무엇이든지 하겠어!!!' 라는 도덕책에나 나올법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면 아무런 문제도 가지고 있지 않겠으나, 인간이란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다. '아, 난 뭣 하게 일하는데 왜 저 놈은 놀고만 있는겨,'

이런 식으로 일이 분산되면 자연스럽게 소속감은 줄어든다. 그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런 의식이 생김으로서 집단은 갈등을 얻게 되고,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집단의 분화로 이어진다. 그것은 일종의 재그룹화라고 볼 수 있는데, 처음엔 '바벨탑 건설팀'에서 시작한 그룹이 A담당, B담당, C담당 으로 자연스럽게 분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재편성으로서 업무가 중요하거나 업무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문학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필자는 시든 소설이든 에세이든 한 데 뭉뚱그려 관리하지만, 문학에 대한 고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장르를 세부적으로 나눈 다는 것은, 그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런 과정을 거쳐서 바벨탑 건설팀은 자연스럽게 그룹을 만든다. 자, 그럼 여기서 끝인가. 끝이 아니다.

건설이라는 것은 것은 어떤 일보다 '전문지식'에 영향을 받는다. 크게 나누면 몇 가지로, 세부적으로 나누면 몇 십까지로. 당장 재료를 무엇으로 정해야 할지 결정하는 일부터, 위에서 열심히 탑 쌓는 사람들이 갈증으로 뛰어내리지 않도록 물을 공급하는 시설도 갖추어야 한다. 정말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자, 그렇다면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 동원을 해 보자. 이 과정에서 위에서 설명했던 그룹의 재편성이 다시 강하게 일어난다. 이들은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인 만큼 전문용어를 사용하고, 이 전문용어란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끼리 통하는 '은어'를 만들어서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필자가 공대생이기에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누군가에게 '매트릭스가 뭐야?' 라고 물어보라. 대부분이 영화를 떠올릴 것이지만 공대생들은 조금 다른 견해를 보일 것이다. 그것도 격한 짜증을 동반한. 그 이유는 단순하다. 누구나 한 번씩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행렬'이라는 것을 공대생들은 다 '매트릭스' 라고 한다. 원서를 사용하고, 시험 문제에도 Matrix라고 표기가 되기에 행렬이라는 말보단 Matrix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더 익숙한 것이다. 당장 대학생활 초반에 나오는 매트릭스...가 아니라 행렬이 이럴진데, 실전에 배치되는 전문지식이란 오죽할까. 병원에서 의사들이 말하는 것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다들 공감할 것이다.

그룹의 재편성이 이 쯤 이루어 졌다면, 모그룹(편의상 바벨탑 건설팀/재편성된 하위 그룹을 모그룹/자그룹으로 부르기로 하자)에 대한 소속감은 거의 상실된 상태이며, 자그룹간에 생기는 의견충돌 및 갈등구조가 격해져서 이건 뭐 해결 불가능 할 정도가 아니라, 서로를 죽이라면 죽일 수 있을 정도까지 격화되어 있을 것이다. 단순히, 돌을 나르는 단순노무자와 그들이 먹을 빵을 세는 사람을 비교해 보자. 단순노무자는 당연히 상대에 대한 불만이 있을 것이다. 자기는 뜨거운 햇볕아래 미친듯이 무거운 돌을 계속해서 날라야 하는데, 상대방은 그늘에 앉아서 빵이나 세고 앉아있다면 누가 좋아라 할 것인가. 반대로 빵을 세는 사람은 역사적인 바벨탑 건축엔 손도 대지 못한 채 하루종을 빵이나 세고 있어야 한다. 왠지 점심에 빵 먹으라고 하면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로 많은 이 빵들을 저기서 역사적 소명을 다하는 노무자들의 입에 X넣어주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자, 이런 식으로 격화된 사이에 말조차 통하지 않는다. 노무자가 빵 세는 사람에게 '가가미 있나염' 이라고 물었을 때, 빵 세는 사람은 '이게 뭔 소리여' 할 것이다. 가가미는 건축현장에서 쓰느 속어인데 거울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빵 세는 사람도 그들 사이에 속어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로서 사이도 안좋은데 의사소통마저 원할하지 않다. 이제는 싸움뿐이다. 주먹으로 말하자. 난 선빵을 칠테니, 넌 몸빵을 준비해라!

이후에 자세히 얘기하곘지만, 이래선 일이고 뭐고 되지도 않는다. 싸우자 시밤쾅. 바벨탑이고 나발이고 너 오늘 잘 걸렸다. 내 손에 죽을것이야! 갓 핑거!!! 는 농담이고, 어쨋든 바벨탑 건설팀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어보인다. 눈을 감으면 그들이 싸우는 장면이 눈에 훤하게 그려질 것 같다. 오 마이 갓. 아, 신한테 가려고 이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참.

이쯤 논의가 진행이 됬으면 뭔가 이상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뭐지... 순수한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끼리 왜 치고 박고 있는거지? 우린 신에게 다가가는 위대한 인물들이지 않은가. 근데 왜 서로 싸우고 있는거지? 이에 대한 대답은 단순하다. 인간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당장 단짝 친구라 할지라도 마음이 안맞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런데 생판 타인이라면 오죽 할까. 게다가 바벨탑 건설팀은 너무나 크기에 자집단, 혹은 자집단의 자집단마저 생기는 판국이다. 이래서야 누군가가 나서서, '우리 바벨탑의 완성을 위해 조금만 참읍시다!!!' 라고 외쳐봐야 소용없다. 당장 앞에 있는 사람들은 옆에 있는 사람 멱살 쥐어잡고 '이새키 주거라!' 를 외치기에 여넘이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기존 바벨탑 신화에서 '이색히들, 감히 신의 자리를 넘봐? 안되겠다. 수리수리 마수리 말아, 뒤섞여라. 얍!' 라고 멋지게 외쳐서 사람들의 싸움을 유도하고, 결국 자발적으로 바벨탑을 뒤엎게 만들었던 위엄있는 신의 모습은 없다. 인간은 자기들끼리 신에게 가까이 가겠다고 바벨탑 만들기 시작하더니 어느순간 자기들끼리 알아서 말을 뒤섞기 시작하고, 어느순간 쌈박질을 시작했다. 아직 바벨탑이 무너지진 않았지만 예전의 신처럼 멋지구리하게 나설 자리는 이미 인간에게 뻈겼다. 신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에라이, 니들끼리 다 해먹어라.' 라고. 오, 드디어 인간이 신을 엿먹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었다. 바벨탑 건설과정에서 신은 철저하게 외면되었고 왕따가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신과 비슷한 존재가 되었다. 신을 다운그레이드 시켰다는 문제점이 남긴 하지만 뭐 어때. '신님은 그냥 TV나 보고 웃기만 하십쇼' 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는 점이 고무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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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자체가 꽤 둔중한 존재를 다루고 있기에 호흡이 한 껏 길어지는데, 여기서 한 호흡 쉬고 가는 시간을 가져보자. 예수는 과연 바벨탑을 사랑했는가? 아니면 바벨탑 건설팀을 사랑했는가? 기존 전설대로라면 이 가설은 의미가 없다. 바벨탑을 무너뜨린 것은 결국 신의 의지였으니까. 하지만 예수는 사도들과 신자들에게 말하길, 원수를 사랑하라 했고, 왼뺨을 맞으면 오른쪽뺨을 내주라 했으며 - 그것이 무조건 적인 용서를 전제로 하는 것이든지, 비단 2배로 갚아주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새디스트여서 그런건지 알 수는 없지만 - 하느님은 인간을 용서하셨다고 했다. 이것을 두고 교회는 '아가페적 사랑' 이라고 했으며, 이 세상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하느님(하느님과 예수와 성령은 삼위일체니까 용어를 혼돈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의 가르침이다. 라고 했다. 자 그렇다면 결론은 방금 전과 정 반대로 나타난다.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들이 고깝기는 하지만 어쨋든 난 그들을 사랑할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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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가르침을 논하기 전에, 우리의 기독교적 문화를 한 번쯤 짚어보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들이 말하길 자신들은 예수님의 의지를 이어나가는 자니까. 그들은 예수가 '아가페적 사랑'을 이룩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적어도 예수만큼은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자에게도 사랑과 자비를 베풀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예수에게 해를 끼친 자들에 대한 태도도 애매해진다.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길 강요한 민중들과, 그들의 의견을 수용한 본시오 빌라도(여기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본시오 빌라도가 자신의 의지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고발한 죄로 자살을 한 유다라든가. 참 말 많은 본시오 빌라도는 분명히 자신의 의지를 개입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용서한다는 견해를(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인지, 그리고 용서의 권리의 유무는 차지하고서라도) 지니지만, 유다에 대한 논쟁은 반반으로 갈리는 추세다. 그가 자살을 선택한 것부터 지옥에 갔는지 천국에 갔는지에 대한 논쟁은 아마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길, 예수는 아가페적 사랑을 하였고, 민중들이든 본시오 빌라도든, 유다든지 간에 그는 이미 용서(정확하게는 그들이 예수에게 죄를 짓지 않았다 하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를 했고, 더 이상의 감정처리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유다가 예수를 배신했다는 죄로 지옥에 보내는 것도 말이 안되지 아니한가. 혹자는 유다가 자살을 했기에 지옥에 갔을 거라고 주장하는 자도 있다. 이건 인문학적 논쟁이라기 보다는 종교적논쟁에 가깝이 때문에(기존까지는 예수의 용서 - 후대의 대처에 관한 문제였다면 앞의 문제는 분명히 종교적 신념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건드리지 않기로 하겠다.

자 그렇다면 선행되었던 대답을 해보자. 아가페적 사랑을 주장한 예수의 제자들이 댄 브라운에게 '바벨탑을 쌓는 적그리스도적 인본주의'라는 비판을 가하는 아이러니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신으로 대표되는 예수의 가르침이 인간에게 전이되면서 비정상적 소통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자체적으로 완벽한 신의 소통과정은 그것으로 종결되어야 하지만,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을 사도들을 통해 전파하도록 했다. 사도들은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무장한 일종의 '신격된 영혼'이었지만, 분명히 인간의 틀을 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신의 소통과정'을 행하지는 못하였다. 이것이 대를 이어 내려오며 불완전한 인간적 소통을 거친 끝에, 결국 예수의 가르침은 이론으로만 남고 인간의 불완정함이 만든 종교적 이상상으로의 기독교만 남아 있는 것이다.(이런 고찰의 과정에서 다른 종교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특히 인간의 형태를 한 '신의 대행자' 를 추종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종교라도 이런 비신적 소통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왜곡이 생기기에 종교는 '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종교를 만들어온 인간의 과정과 바벨탑의 경우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바벨탑에서 '신'은 행위가 존재하는 절대적 이유로서 존재했지만, 과정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마찬가지로 종교의 경우도, '신'은 인간에게 종교를 만든 기초를 다져주는 이유로서 존재했지만, 종교의 전파 과정에서는 전혀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런 현상은 꽤나 큰 의미를 가져다 준다. 이른바 실존주의로 대표되는 이론들의 큰 틀이기도 하고, 인간의 생에서 신이 행하는 역할에 대한 평가절하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어쨋든, '신은 죽었다' 라는 니체의 말이 허투로 들리진 않는다.

인간은 신을 사랑하고, 신은 인간을 사랑하지만 인간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는 치명적 구조적 모순이며 바벨탑의 경우와, 예수의 가르침인 아가페적 사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바벨탑을 사랑하였을까? 예수는 바벨탑을 사랑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를 따르는 사도들은 바벨탑을 증오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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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서 본 칼럼을 마치고자... 하는 찰나에 한가지 의문이 든다. 잠깐. 우리 뭔가 하나 거대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필자는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에서 예수의 아가페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 와중에 신의 심리를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들이 고깝기는 하지만 어쨋든 난 그들을 사랑할 것이야.' 이렇게 표현했다. 그런데 이정도로 논의가 진행된 마당에 왜 다른 생각이 드는 것일까. 예수는 과연 신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을 부담스러워 했을까? 니들이 하는 짓은 맘에 안들지만 나는 너를 사랑하겠노라고? 예수는 신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사이에서 인간을 교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인간을 천국으로 보내겠다는 신념이었을까? 지옥이 너무 좁아서 기존 거주자들이 항의를 해와서? '애들이 너무 많이 와서 내가 지옥불을 쪼일 수 있는 면적이 줄어들었어요!!!' 라고?!

아, 그래. 바벨탑에 대한 전설에 대한 재해석은 처음부터 잘못된 선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신이 그들을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으냐에 대한 논쟁은 의미 없는 것이었다. 신은 그들을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었다. 예수가 심심해서 인간의 몸으로 환생했고,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인간을 교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외에도 많은 구세주들이 인간에게 가르침을 주려고 했던 것들은 모두 신이 인간을 사랑했고, 인간을 신격화 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바벨탑에 대한 전제는 잘못되었다. 신은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을 고까워했던 것이 아니라 격려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발적으로 바벨탑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결국 인간이 문제였던 것이다. 신격화 되고 싶다는 욕망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너희는 신이 되어라.' 라고 말하자 인간은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제가 신처럼 될 수 있는 건가요?' 만일 신이 돼지에게 '너희는 신이 되어라.' 라고 말했다면, 돼지는 '어, 자네도 신인가?' 이라고 대답했겠지. 결국 바벨탑을 쌓는 행위는, 신에게 가까워지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을 더욱 인간스럽게 만드는 행동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신은 분명 그것을 안타까워 했을 것이고.

Fin.


덧붙이자면, 바벨탑을 만드는 행동은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행동이고 그것을 안타까워한 신이 바벨탑을 부순다. 라는 논리가 결론적으로 나온다는 것인데, 그렇다는 것은 인간이 신격화 되기 위한 방법은, 신격화 되지 않는 길(자기 자신에 대한 완성도를 높이지 않는 길)을 택하는 것이고, 그 길은 자연스럽게 이타적 행동으로 발현되기 때문에, 예수의 '아가페적 사랑'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쪽까지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것은 글에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고, 미친듯한 텍스트의 남발을 불러올 것 같아서 심의삭제... 랄까, 너무 길어졌다.

by 이스킨★ | 2009/06/14 15:01 | Thinking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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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책사풍후 at 2009/06/14 17:18
글이 이렇게 길어서야.. 글은 간단한게 최고
Commented by 이스킨★ at 2009/06/16 18:37
그러게요... 아직 필력이 좀 후달리는 증거입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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