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705]텍스트를 무차별적으로 소모하다

글쎄, 내가 처음 입대를 하며 2년간 가장 고통스러울 거라고 예상했던 건.

1. 컴퓨터의 부재.
2. 핸드폰(소통)의 부재.
3. 책의 부재.

이렇게 3개 였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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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부대에 '사지방'이 활성되어 있는 관계로 1번은 해소.
2번은 오히려 이쪽에서 전화를 잘 안할 정도로 전화를 할 사람이 없었더랬다.
역시 인간이 하는 96%의 걱정은 쓸모 없는 거라고 하지 않던가.
약 1년 반 전에 미친듯이 하던 고민들은 자대에 도착하는 순간 해소되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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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책으로 대표되는 활자의 부재를 뼈저리게 체험한 것은 훈련소 때.
화장실에 앉아서 자살하지 않는 10가지 방법 따위를 열심히 읽었더랬다.
그거 말고는 도무지 읽을 게 없었는데, 뭐라도 분명히 읽고 싶었으니까.
(잘 생각해보면 그건 활자든 텍스트든지간에 상관 없었을 것 같다)
어쨋든 그런 식으로 읽기에 훈련소에서 제공하는 활자는 너무나도 미비했다.
결국 매일 일기를 쓰는 식으로 그 욕망을 어느 정도 해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없는 시간을 쪼개 일기를 썼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지만.
후반기 교육때야 읽을 거리(교재였지만)가 충분했기에 참 열심히 읽었다. 공부도 했고.
비록 그것이 자대와서 전혀 필요없는, 휴지보다 못한 지식이긴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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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군대엔 책이 많다. 부대마다 도서관이 있고, 진중문고도 나오고, 간행물도 나온다.
도서관엔 분기마다 약 1~200권의 책이 추가되고, 그 중엔 베스트셀러도 많다.
그리고 기초적인 철학서라던가 인문서, 문학의 경우엔 읽고 넘칠 정도로 있다.
(이것은 우리 부대가 규모가 상당히 큰 부대라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진중문고는 아무리 봐도 그 순환주기는 잘 모르겠지만, 참 멋진 책들이 많다.
일반적으로 흘려 넘길 책이지만, 어쨋든 진중문고라서 읽어보면, 의외의 보석인, 그런 것들.
월 간행물의 경우엔, 좋은 생각과 샘터, 에세이, 르페르(여행지), 자유(장애) 등등등...
정말 무엇인가를 읽고자 하면, 그것은 시간의 문제지 활자의 문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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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부대의 상황은, 약 2달간의 '활자'의 고립에서 헤매던 나에게 샘물 같은 곳이었고
자대에 도착해 적응기가 끝나자마자 정말 '폭발적'이라 할만큼 책에 빠져 들었다.
고등학교 때도 참 많은 책을 읽었다고 자부했는데(한달에 약 10권 정도를 읽었었다)
약 18개월의 군생활동안(그 중 자대 생활은 16개월) 대략 200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그 중에 바빴던 2008년(이등병때야 말할 것도 없고, 10~12월은 사무실이 정말 바빴다)엔
정확히 76권의 책을 읽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2009년 전반기에만 거의 120권이 넘는 책을 '읽어 제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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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른바 '무차별적 텍스트의 소비'는 과연 나에게 도움을 줬을까?
내가 읽어제낀 책 중에는 바리데기와 개밥바라기별, 손님의 황석영씨의 글이 있었고
우행시와 에세이집의 공지영씨가 있었고, '신'으로 대표되는 베르나르의 소설도 있었다.
이 외에도 정통판타지를 비롯해 국내외를 넘나드는 광범위한 소설에 손을 대었고
상대방을 상처입히지 않는 대화법 78가지 등의 자기계발서도 있었고
영화 평론에 대한 책도 있었고, 키메라의 아침 같은 특이한 구조의 글도 있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읽으며 코 끝이 찡해지는 감동을 얻기도 하고
황석영씨의 '바리데기'를 읽으며, 차원을 넘어가는 황석영씨의 글에 충격도 먹고,
어스시의 마법사 전집을 독파하며 '판타지'라면 왠지 깔보던 예전의 나를 반성도 하고,
이제 자기계발서를 슬쩍 훑어만 봐도 무슨 구조인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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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6월에 읽은 책을 종합했을 때, 34권이라는 권수에 약간 움찔했다.
행정병이라는 직책은 생각보다 시간이 여유롭지 않다.
일과시간은 통째로 날리고, 잦은 호출과 야근은 책 읽을 시간을 압도적으로 뺏어간다.
하루에 책 읽을 시간을 많이 내봐야 2~3시간. 그것도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하지만 이런 시간으로 34권을 읽어냈다는 것은, 책 한권당 2시간 정도에 읽었다는 말이 된다.
내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어느순간 반성을 하게 되었는데,
'과연 나는 책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인가.' 라는 것이 그 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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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자기계발서나 에세이 같은 경우는 빠르게 읽을 수 있다.
나에게 있어서 필요 없는 부분은 뛰어넘으면서 읽기도 하니까, 1시간에도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한 달 내내 자기계발서만 읽어제낀건 아니니까.
그렇다는 것은, 어느순간부터 '많이 읽기'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좋다.
하지만 대충 건성건성 활자만 읽어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
책이 가지는 진실된 메세지를 읽지 못한 채,
활자만 읽는 거라면 만화책을 보는 것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내 자신에게 '넌 책을 깊이 있게 읽고 있니.' 라고 물었을 때 대답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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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여기까지 진행되자, 내 머리속은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아,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라는 생각도 들고.
과연 텍스트를 무차별적으로 소모하는 지금 상태를 유지해도 좋은가, 라는 의문도 들고.
사실 아직도 정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일부러 천천히 읽을 수도 없잖아?
역시 책 읽는 습관이 잘못 되어 버린걸까(납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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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어제 불침번서며 했던 생각을 열심히 메모했다가 살을 붙여서 옮긴 것인데
실제로 생각한 것의 1/10도 못되는 것 같다. 역시 생각->메모->구현화는 어렵지.
2시간 내내 아무것도 안하고 저것만 생각하다가 막판에 왜 자냐고 욕 먹었다.
나 안자고 있었는데 ;ㅅ;
하긴, 꿈쩍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다 그렇게 생각하려나.
애초에 '외부감시'라는 임무 수행은 저 별나라로 가 있었긴 했지만.
쨋든, 이 주제는 요 며칠 간 내 머리 속을 떠돌며 항상 날 괴롭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책을 정성들여서 읽지 않는 것도 아니고 말야.
이건 책을 더 읽어야 해결될 문제라고 자답하고 있다. 응응.

by 이스킨★ | 2009/07/05 14:42 | 생활의 기록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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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토마 at 2009/07/05 22:44
부대마다.. 도서관이있다니...
Commented by 이스킨★ at 2009/07/07 18:32
저 이래뵈도 2작전사령부 출신이라능.
Commented by 역설 at 2009/07/05 23:36
생각을 많이 하시는 것 같으니까 상관없지 않을까요^^;; 소화를 오래오래~
Commented by 이스킨★ at 2009/07/07 18:33
그 생각들이 모두 뒤엉킨채 허공으로 증발하는게 문제임다 ㅠㅠ
Commented by 악당병아리 at 2009/07/06 18:22
책을 ..먹어버린거냐...
Commented by 이스킨★ at 2009/07/07 18:33
꾸역꾸역... 체하게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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